푸치니는 이태리 토스카나 지방 (피렌체가 주도임)의 작은 도시 루카에서 5대에 걸친 약 150년간의 음악 집안에서 태어난다. 어린 시절 특별한 음악적 재능을 보이지 않고 병약하며 매사 관심이 적어 작곡가로 대성할 기미를 보여주지 못했고 학교 성적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은 연금으로 살아야 하는 환경에 놓이게 되며 1남 4녀를 키우는 억척같은 어머니 슬하에 자란다.
그러면서도 어린 나이에 루카음악원에서 오르간과 피아노를 배워 오르간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고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연주로 생활비를 벌기도 한다. 18세 무렵인 1876년 피사에서 공연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보고 감동받아 오페라 작곡가가 될 것을 결심한다.
이후 어머니와 집안의 도움으로 1880년 23세 때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하여 폰키엘리, 바치니 등의 스승에게 사사한다. 작곡가 피에트로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작곡가)와 함께 고학을 이어가고 1883년 26세에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한다. 3년의 유학생활은 고향에서보다 더 궁핍했다. 후에 그는 “밀라노 생활은 인생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나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시절”이라 회상한다.
푸치니의 음악재능을 인정한 스승 폰키엘리(1834~1886)의 도움으로 1884년 하이네와 고티에의 원작에 의한 첫 오페라 ‘빌리‘를 발표하여 호평을 받는다. 이에 따라 밀라노의 저명한 음악출판사 리코르디와 계약하고 리코르디는 이후 계속해서 푸치니 작품 보급에 큰 역할을 한다.
두 번 째 오페라 작곡 중 어머니와 동생을 사별하는 불행을 겪고 겨우 완성된 작품, 알프레드 드 뮈세 원작에 따른 ’에드가르‘가 1889년 밀라노 스칼라극장에서 공연되지만 실패로 끝나고 인고의 세월을 겪는다.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한 시기는 1895년 38세 때 자신의 창작의 기본적 스타일을 확립하면서부터이다. 아베 프레보의 원작을 토대로 쓴 ‘마농 레스코’를 무대에 올려 성공을 거두며 자신감을 갖게 된다.
첫 성공작 ‘마농 레스코’를 준비하면서 프랑스 선배 작곡가 쥘 마스네의 같은 이름인 오페라 ‘마농’의 장면과 겹치지 않도록 하고, 가슴 저미는 선율과 서정적 멜로디로 극적 장면을 연출한다. 아름답고 요염하며 화려한 생활을 선호하는 여주인공 ‘마농’은 부유한 남작과 살지만 죄인의 신분이 되어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미국으로 보내지고 낯선 땅에서 사랑하는 이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이야기다. 푸치니는 이처럼 작품 속에서 자신이 그리는 이상적인 인물을 담고 있다.
그의 본격적인 명작 탄생은 1896년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초연된 ‘라보엠’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은 푸치니가 밀라노 유학생활을 기억하면서 만든 작품이다. 파리 다락방에 기거하면서 가난한 현실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젊은 예술가 지망생들을 그린 작품 속에 청중은 서민에 대한 푸치니의 따뜻한 마음에 공감하고 애수감을 띠면서도 매력적인 선율에 듬뿍 매혹된다.
베르디의 오페라가 시대에 맞추어 정신적인 요소들을 강조한 반면에 푸치니의 오페라는 청중들이 한층 더 작품 속으로 몰입되는 흥미로운 요소가 강하다. 푸치니는 베르디와 연령이 45세 차이난다. 푸치니가 왕성한 활동을 벌일 때는 베르디가 만년을 맞이한 시기이다. 따라서 이태리 청중은 베르디에서 이어지는 불후의 명곡을 푸치니에게서 맛볼 수 있게 된다.
푸치니는 20세기에 접어들어 이전과 다른 감성의 작품을 선보이며 토스카(1900), 나비부인(1904), 서부의 아가씨(1910) 등의 작품을 연이어 내놓는다.
토스카와 관련된 일화이다. 그는 1889년에 사르두의 연극 토스카 (사르베르나르 주연)를 처음 봤을 때 작곡하고 싶었는데 11년 만에 마침내 오페라로 만들어 낸다. 불세출의 소프라노가수 마리아 칼라스가 수많은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그 중에 단 한 역만을 뽑으라면 토스카를 꼽는 것도 이 작품이 푸치니 오페라 중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말해준다.
푸치니는 이 작품에서 운명에 순응하기보다는 본인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정열적 여인상을 그린다.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는 일과 사랑을 위해 산다는 의미다. 즉 죽을 만큼 열정적으로 살고자하는 진실 되고 적극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결국 자신의 사랑을 위협하는 경찰서장 스카르피아를 칼로 힘껏 찌른다. 도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성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막이 내린다.
나비부인과 관련된 일화로서 그가 런던 여행 중에 벨라스코가 대본을 쓴 연극 나비부인을 관람한 푸치니는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희생에 감동받아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고 하며 이상적인 여인으로 각인된다. 벨라스코로부터 판권을 획득하고 작곡을 준비한다. 그는 일본 색채를 살리려 일본음악 공부, 자료 조사, 분석을 통해 나비부인을 탄생시킨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요트를 ‘초초상(나비부인의 이름)’이라고 부를 정도로 나비부인을 사랑한다. 밀라노 초연에서 호응이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새로 손을 본 뒤 3개월 후 브레시아 공연에서 호평을 받는다.
이국적 소재에 관심이 많은 푸치니는 ‘서부의 아가씨’로 나아간다.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현지에서 취재한 오페라로 1910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극장에서 초연하며 1850년대 서부개척 시대에 용감하고 긍정적인 사고로 역경을 헤쳐가는 ‘미니’라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초연 당시 호평을 받았으나 지금은 구성에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하여 공연기회가 적다.
1차 세계대전(1914-1918)을 거치면서 ‘제비’, ‘외투, ’수녀 안젤리카‘, ’잔니 스키키‘로 이루어진 ‘일 트리티코 3부작’(1918년 뉴욕)을 발표하면서 독창적인 감각을 더욱 가다듬는다. 이 3부작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으로부터 소재를 가져왔으며 음악으로 옛 전통과 이어주는 계기가 된다.
푸치니는 중국의 전설을 주제로 한 ‘투란도트’ 작곡에 착수했으며 미완성작으로 남을 뻔 했으나 밀라노 음악원 후배 프란코 알파노에 의하여 완성되어 토스카니니 지휘로 밀라노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된다. 푸치니는 제자를 둔 적이 없으므로 제자가 완성되었다는 말은 와전된 것이다.
푸치니는 자신의 최후의 세리아 오페라 ‘투란도트’를 통해 18세기 ‘코메디아 델라르테(즉흥 희극)’ 작가인 카를로 고치(1720-1806)의 원작인 ‘투란도트’를 되살려 놓는다. 푸치니는 사랑을 통해 아름다움이란 이상향에 도달하고자 했던 작품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완성하지 못했으나 토스카니니의 노력으로 ‘투란도트’는 청중에게 소개되고, 대가의 삶에 월계관을 씌우게 된다.
푸치니 오페라의 주역은 대부분 서민이며, 여주인공은 청중의 동정심을 사로잡기 쉬운 캐릭터로 설정한다. 비운의 여주인공에게는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아름다운 멜로디의 곡이 주어져 푸치니의 인기를 한층 더 높게 만든다.
이태리 통일 전에는 통일이라는 국가적 과제로 인해 관객은 주로 애국심을 북돋울 수 있는 선이 굵은 남성적인 주제를 선호했으나 19세기 후반 이러한 논란이 예술세계에서 정치세계로 넘어간다. 관객은 편안한 무드 속에 인간의 감성이 극적으로 표출되는 공연을 요구하고, 푸치니는 이러한 음악계의 변화에 따라 작곡기법을 본인의 방식대로 바꾸어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다. 이태리 오페라의 특징인 아름다운 선율의 멜로드라마는 유지하면서, 바그너의 독일 오페라적인 오케스트라 작곡기법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적용한다.
19세기 후반은 베르디와 바그너가 중심인 낭만주의 오페라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던 시기다. 이때 ‘베리스모’ 오페라가 역할을 한다. 베리스모는 문학의 리얼리즘을 의미하는 만큼 바그너의 영웅에 관한 전설과 베르디의 엘리트주의적이고 고전적인 격식에 중압감을 느끼던 청중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예컨대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바장조의 간주곡과 ’오렌지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의 여성합창으로 유명)(1890)와 루치에로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1892)는 베리스모 오페라 대표작들이며 이들은 민초들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푸치니의 음악 스타일은 지나칠 정도의 기교적인 성악과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아 베리스모 작곡가들과 크게 닮았지만 이들과 확실한 차이점이 있다. 예컨대 그는 현실적인 소재 가운데서도 등장인물의 내적 갈등을 깊이 묘사할 수 있는 스토리라면 미국이나 고대 중국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푸치니는 프랑스 작곡가 마스네(오페라 ‘타이스’에 나오는 타이스 명상곡으로 유명)의 ‘서정미’와 이태리의 베르디의 ‘선율’과 독일의 바그너의 ‘영웅적 서사시’가 함의하는 바를 자신의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말하자면 푸치니는 20세기 새로운 종합예술 장르인 영화와 연계되는 오페라예술의 거장 자리를 차지한다.
베르디와 바그너의 그늘로 인해 푸치니는 낮게 평가될 법도 하나 푸치니의 진면목을 이해하면 달라진다. 바그너와 베르디 음악에 대한 해석의 일인자인 토스카니니가 푸치니를 그토록 존경한 까닭이 분명 있는 것이다. 포레와 뒤카, 드뷔시 같은 프랑스 작곡가들이 푸치니에 대해 경계의 시선을 보내기도 하지만 새로운 조류에 개방적인 구스타프 말러와 모리스 라벨은 푸치니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말러는 푸치니 작품을 유럽과 신대륙에 먼저 나서서 소개한다. 교향곡 작곡가 말러와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를 연결하는 고리는 바그너의 관현악에 대한 깊은 공감대이다.
반음계적인 선율과 아름다운 멜로디의 성악과 이를 받쳐주는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표현은 푸치니가 바그너와 베르디를 결합시키는 탁월한 능력이다. 그리고 단순한 베리스모 스타일의 작곡에 머물지 않고 등장인물의 예민한 심리를 섬세하게 담아낸다. 이러한 점들이 말러와 토스카니니가 거장으로서의 푸치니의 손을 치켜들게 된 요인이라 믿는다.
‘토스카’는 바그너의 흔적이 역력한 작품이다. 작곡가는 ‘라이트모티프’를 적극 사용한다. 라이트모티프(Leitmotiv, 유도동기)는 오페라나 교향시 등에서 특정 인물이나 상황과 결부되어, 반복해 사용되는 짧은 주제나 동기를 말한다. 악역인 스카르피아의 어두운 욕망을 묘사하는 선율이 극 전체를 지배하고, 토스카와 카바라도시, 쫒기는 안젤로티가 각자의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말러는 토스카, 라 보엠, 나비부인을 즐겨 지휘한다.
‘투란도트’는 오페라 세리아 역사의 마지막을, ‘잔니 스키키’는 오페라 부파 계보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태리 작곡가 조반니 페르골레시(1710-1763)의 ‘마님이 된 하녀’로 출발해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거쳐 로시니의 ‘세빌리아 이발사’, 베르디의 ‘팔스타프’로 이어지는 코미크 오페라의 흐름에 ‘잔니 스키키’로 대미를 장식한다. 아버지 뜻에 반하더라도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남녀의 절절함을 음악의 힘으로 뜻을 이루는 스토리 전개는 청중들로 하여금 한껏 미소 짓게 만든다.
푸치니는 훗날 애증으로 점철될 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채 엘비라 본투리(1860~1930)를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유일한 혈육인 아들 안토니오(1886~1946)를 낳자 조용한 도시 루카에 소동이 벌어진다. 엘비라는 아이가 둘 있는 유부녀, 부유한 남편은 푸치니의 소꿉동무였기 때문이다.
이태리는 바티칸 영향으로 보수 성향이 강하고 지방 소도시는 더욱 그러하다. 결국 두 사람은 고향 루카를 떠나 20㎞ 떨어진 호수 마을 토레 델 라고로 이주한다. 푸치니는 말년에 건강악화로 비아레조로 이사 가기 전까지 40여 년을 이곳에서 작곡에 몰두한다.
토레 델 라고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말도 나누지 않지만, 푸치니가 세계적인 작곡가로 명성을 얻은 후 마을은 주목 받는 혜택을 누리게 된다. 1935년 이래 푸치니를 기념하고 그의 작품을 공연하는 ‘푸치니 페스티벌’은 푸치니가 살던 호수 옆 야외극장에서 열린다. 페스티벌 기간인 7, 8월에 5만 명을 상회하는 관광객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니 지역 경제를 푸치니가 살린다.
푸치니 부부는 엘비라의 전 남편 사망 이후 1904년 혼인신고를 한다. 당시 푸치니는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어 혼인신고를 안 할 수도 있던 상황이라 세간에서는 “책임 있는 결단”이라 하지만 아들에 대한 아버지로서 책임이자 사랑이 작용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엘비라는 당시 가진 것도 별반 없는 푸치니에 대한 사랑 하나만 믿고 모든 것을 버린 자신의 인생이 파란만장해진 것에 대한 보상으로 모든 것을 본인 의도대로 움직이고자 한다. 동시에 남편에 대한 병적인 집착으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상태에 이른다.
자동차 운전을 즐기는 푸치니가 1903년 사고로 크게 다치자 집안일을 도와줄 소녀 도리아 만프레디(1885~1909)를 고용한다. 엘비라는 질투심으로 의심하기 시작하고 견디다 못한 도리아가 그만두자, 엘비라는 소문을 내면서 도리아가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도리아는 자살하고, 그의 가족들은 엘비라를 고소한다. 이 사건이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감식 결과 처녀로 판명되면서 엘비라는 5개월 형이 처해진다. 유명 일간지는 ‘바로 이것이 오페라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채운다. 양심의 가책과 명예에 손상을 입은 푸치니는 엘비라와 헤어지려 하지만 어머니를 구치소에 내버려두면 입대하겠다는 아들의 호소로 도리아의 가족에게 거액의 위자료를 주고 합의를 본다.
매정한 얼음공주 투란도트는 부인 엘비라, 다른 여인을 사랑하는 칼라프 왕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여인 류는 도리아라고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아이러니하게 토레 델 라고 마을에서 푸치니 페스티벌 홍보 책임자인 마리안나 만프레디는 도리아 사촌의 손녀다. 30대 초반에 홀로 되어 5남매를 기른 푸치니의 어머니는 매사에 철저하며 엄격하고 강한 캐릭터의 소유자다. 아내인 엘비라도 강한 성격이다. 따라서 푸치니의 마음속에는 항상 지순한 여인에 대한 동경이 깔려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푸치니는 가난을 비관하거나 가난 때문에 슬퍼하지 않으면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젊음이 주는 권리를 마음껏 누린다. 이 시기에 푸치니의 자유분방한 여성편력으로 자코모 카사노바(1725~1798)에 이어 자코모 푸치니 (말하자면 두 자코모)는 이태리 남성이 여성편력이 심하다는 오명을 남기는 데 일조한다.
그가 창조하는 주인공들은 청중을 열광시킨다.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결정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열정적인 인물들이다. 무자비한 세월을 살아온 이태리 국민들에게 그의 오페라의 로맨티스트적인 무드는 환상 그 자체다. 우아한 선율, 우수에 젖은 듯 애틋함, 고도의 긴장감으로 청중에게 다가간다. 예리하고 본능적인 직감으로 등장인물의 연기와 동작, 소품까지 음악으로 표현한다. 등장하는 배우는 음악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면 되도록 자세하게 묘사한다.
66세 생일 직전 1924년 11월 29일 브뤼셀에서 후두수술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푸치니의 장례식에는 이태리를 대표하는 거장의 죽음을 애도하며 총리 자격으로 무솔리니가 조사를 읽는다. 푸치니는 어떠한 정치 이념적 사상에 동조하지 않고 예술가일수록 정치에 개입하면 대중은 예술로 인해 현혹당할 수 있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푸치니 이후 카루소, 탈리아비니, 칼라스,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 (테너 삼총사) 등 걸출한 성악가들의 출현으로 오페라 작품은 계속 무대에 오르고 현대화로 각색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푸치니와 그 이전의 작품들이다. 공연비용의 막대함, 짧은 시간의 선호 등의 이유로 오페라 입지가 축소되는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푸치니가 아날로그적 음악에 맞는 인물을 창조한 마지막 오페라 작곡가로 여겨지는 것은 시대적 변화이며 우리들도 새로이 등장하는 음악 장르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고 문헌: 위키백과, 장일범 기고문, 정준호 푸치니 그는 누구인가, 황승경 국제오페라단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