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니젯티와 사랑의 묘약

19세기 전반 이태리 벨칸토 오페라 작곡가 대표 3인은 로시니, 벨리니, 도니체티이다. 도니체티(1797-1848)는 이태리, 프랑스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로시니와 벨리니를 연결한 인물로 평가 받는다.


그는 알프스 산자락 롬바르디의 베르가모에서 음악과 상관없는 가난한 집안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마을 전당포 관리인인 아버지 슬하 세 아들 중 막내다. 어린 시절 합창단에 있었으며, 지휘자 요한 마이어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음악을 가르친다. 성년이 된 후 볼로냐의 마테이 신부에게서 대위법을 2년간 배운다.

 

그는 오페라 작곡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 25세에 첫 오페라 ‘집시 여인’으로 음악계를 놀라게 하며 30년동안 매년 2편 이상 작곡하여 67편의 오페라를 선보인다. 그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세계 오페라 무대를 장식하는 이유는 감미로움 때문이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감동적인 하모니가 전편을 감싼다. 극중에 나오는 슬픈 내용에 대해 ‘슬프도록 아름답다’ 라고 표현해야 어울린다.

 

1822년. 1월, 로마 초연 ‘조라이다 디 그라타나’ 가 성공을 거두고1830년 오페라 ‘안나 볼레나’를 통해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의 기법은 점차 원숙해져 오페라 부파 작품으로 사랑의 묘약(1832), 연대의 딸(1840), 돈 파스콸이레(1843) 등을 내놓고 오페라 세리아 작품으로는 루크레치아 보르지아(1834), 람메르무어의 루치아(1835) 등을 남긴다




그는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가운데서도 불행한 일을 연속적으로 만난다. 나폴리의 작곡 의뢰자와 말다툼 끝에 공연에 실패하고 아내가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다. 아이 셋 중 둘은 사산하고 셋째는 며칠만 생존한다. 아내가 세상 떠나기 바로 전 해에 부모님이 돌아가신다. 설상가상으로 작품 ‘폴리우토’가 성인의 순교장면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공연이 금지된다. 그는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작곡활동에 몰입한다. 아니 작곡활동에 몰입함으로써 숱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도니체티의 활동 시기는 오페라 명가수가 다수 배출되던 시대이므로 성악의 기교를 한껏 과시하는 부분이 많이 나오며 예로서 ‘루치아’의 광란의 장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사랑의 묘약과 같이 유려하고 감미로운 멜로디의 창작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도니체티의 작곡 포인트는 뛰어난 가수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최대한으로 발현시키는 데에 있었다.


도니제티가 로마니의 대본을 바탕으로 탄생한 2막 오페라 ‘사랑의 묘약’은 1832년 5월 12일 밀라노 카노비아나 극장에서 초연된다. 2주만에 썼으며 2막에서 남자 주인공 네모리노의 테너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리아이다. 대본가 로마니는 이 아리아가 극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고 만류했으나 도니체티의 고집으로 오페라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작곡 속도가 빠르기로 유명하다. ‘롯시니가 ‘세빌리야의 이발사’를 13일 만에 작곡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게으름뱅이니까’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밀라노 카노비아나 극장 지배인은 당황하고 있다. 공연키로 한 신작 오페라 연습까지 2주 남았는데 작곡가가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2주 만에 다른 작품을 준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부득이 도니체티에게 부탁해 본다. 도니체티는 2주만에 완성키로 약속하고 로마니에게1주만에 대본을 써달라고 요청한다. 힘을 합쳐 능력을 보여 줄 좋은 기회라 여겼다. 도니제티와 로마니는 당시 인기 높던 다니엘 오버의 오페라 작품 ‘미약(美藥)’ 대본을 대폭 수정하여 ‘사랑의 묘약(妙藥)’으로 완성하고 무대에 올린다.”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妙藥)’이 오버의 미약(美藥)의 프랑스어 대본을 이태리어로 바꾸고 주인공 이름도 다르다. ‘미약’의 주인공들은 귀욤, 테레친, 줄리쾨르, 닥터 퐁티라로스이며 각각 ‘사랑의 묘약’에서의 네모리노, 아지나, 벨코레, 둘까마라에 해당된다. ‘사랑의 묘약’은 밀라노에서 성공을 거둔 후 파리로 진출하고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미약’과 경쟁을 펼친 후 오버의 오페라 미약은 더 이상 공연되지 않는다고 한다.


도니제티는 인물 자체로도 매력이 있다. 대본가 로마니의 부인은 도니제티 사후 출간된 책에서 “그는 키가 훤칠하고 검게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지닌 미남이며,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이어서 부인들은 모두 그에게 정신이 팔렸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도니체티의 최대 유산은 이태리 최고 작곡가 베르디에게 미친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베르디가 작곡을 시작할 무렵, 이태리 오페라계의 작곡가는 도니제티 뿐이다. 베르디는 도니체티의 작품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자주 찾고 도니제티에 대해 존경을 표한다. 도니제티 사후 20년에 베르디는 이태리 정부 훈장을 반환하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십자훈장을 반환한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아름다운 선율로 세상을 충만하게 해준 벨리니와 도니체티의 추억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다.”


‘묘약’ 스토리는 그리스신화에 기원을 두고 있어 유럽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다. 이 스토리를 처음 오페라로 만든 사람은 이태리의 실비오 말라페르타다. 그는 미약(Il filtro)이라는 제목의 오페라를 작곡하여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묘약을 소개한 바 있다. 프랑스의 다니엘 오버 (1782-1871)는 말라페르타의 대본을 토대로 1831년에 미약(Le philtre)이라는 타이틀로 오페라를 만들었다. 대본가 유진 스크리브가 말라페르타의 이태리어 대본을 프랑스어 대본으로 손질하여 바꾸었다. 로마니는 이를 이태리어로 재 탄생시켜 도니체티가 곡을 붙여 사랑의 묘약으로 대성공을 거둔다.


그의 형 주세페 도니체티(1788-1856)도 작곡가이다. 오스만 제국에서 활동하고 오스만제국 국가를 작곡하였다. 이슬람교로는 개종하지 않고 사후 터키 이스탄불 가톨릭성당에 안장된다. (참고문헌: 무대 뒤 이야기, 밀턴 브레너, 김대웅 옮김, 위키백과, 조선일보 기사 등)




도니체티와 오페라 사량의 묘약 by 김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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