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는 1813년 10월 이태리 북부 에릴리아로마냐 주 작은 마을 론콜레에서 태어난다. 베르디가 두 살 때인 1814년에 이 지역을 점령한 오스트리아 군인들이 주민들을 학살한다. 베르디의 어머니는 어린 베르디를 옆구리에 낀 채 밧줄을 타고 종루 꼭대기에 올라가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오늘날 우리가 베르디의 음악세계를 접하게 된 것은 목숨 건 위대한 모성애의 덕택이리라.
‘낫’이란 뜻의 론콜레는 베르디가 태어날 당시 대장간과 농가 몇 채만 있었다. 1963년에 론콜레 사람들은 베르디를 기념코자 이름을 ‘론콜레 베르디’로 바꾼다.
베르디의 아버지는 작은 여인숙을 겸한 식료품점을 운영하였다. 베르디는 교회에서 음악을 접하고 10세 때 오르가니스트가 된다. 인근 도시 부세토의 상인으로서 베르디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안토니오 바레치는 베르디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한다. 1831년 5월 부세토 기숙학교에 다니던 베르디는 바레치 집에 기거하며 바레치의 네 딸 중 장녀 마르게리타에게 피아노와 성악을 가르친다.
1832년 베르디가 18세 때에 밀라노로 가서 밀라노 음악원에 지원하였으나 연령 초과 등으로 입학하지 못하고 부득이 개인 교습으로 작곡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던 중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다. 밀라노 음악인협회가 주관한 하이든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연주회 때 대리 지휘를 맡게 되는데 역량을 인정받아 오페라 작곡을 의뢰 받는다. 이리하여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의 작곡을 구상하였으나, 1834년 취직과 결혼 등으로 귀향한다.
1836년에 베르디는 부세토의 음악감독이 되고 마르게리타와 결혼식을 올린다. 1839년에 오페라 작품 활동에 전념코자 처자를 데리고 밀라노로 이주한다. 이 무렵 그의 첫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가 밀라노 스칼라극장에서 공연되어 성공을 거둔다. 유명한 악보 출판업자 조반니 리코르디가 출판을 요청하고, 스칼라극장에서 3편의 오페라 작곡을 의뢰해 온다. 호사다마라고 하던가. 전도가 양양한 그에게 이때부터 온갖 시련이 닥친다.
연년생 남매의 탄생의 기쁨도 잠시 두 아이를 모두 잃고 1840년 6월 사랑하던 부인마저 세상을 떠난다. 설상가상으로 스칼라극장이 오페라 부파를 작곡해 줄 것을 요구해 부득이 구상을 변경하여 ‘하루 만의 임금님’을 작곡했으나 실패한다. 상심한 베르디는 작곡을 단념할 마음까지 먹게 된다.
베르디는 말년에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무시무시한 운명이 연속으로 엄습했다. 4월 초 아프기 시작한 아이가 숨졌다. 며칠 뒤 더 어린 딸까지 병에 걸려 죽음으로 끝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았나 보다. 6월 초 며칠 동안 아내가 뇌막염을 앓다가 6월 19일 세 번째 관을 내보내야 했다. 혼자가 되었다. 적막강산이다. 두 달여 흐르는 동안 사랑하던 세 사람이 영원히 작별했다. 내 가정은 무너져 내렸다.” 그는 2년여에 걸친 일을 두 달이라 표현했다. 짧은 기간에 감당해야 할 고통이 너무 큰 탓이리라.
베르디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너무나 좌절한 나머지 삶도 음악도 포기한 상태였으며 오페라 작곡가로서 인생을 접으려 할 찰나였다. 이때 스칼라 극장장 메렐리가 찾아와 작곡하라고 간곡히 설득한다. 스칼라극장은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오페라 세계의 중심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많은 작곡가 중 한 명이고, 경력도 많지 않은 젊은 베르디에게 중요한 위치에 있는 스칼라극장장이 찾아와 작품 의뢰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행운이다. 그의 간곡한 부탁과 친구들의 격려와 조언으로 베르디는 다시 펜을 잡고 불멸의 작품을 잇달아 내놓는다.
1842년-1850년 사이에 14곡의 오페라를 쓰며 이 중에서 ‘제1회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1843), ‘에르나니’(1844), ‘잔 다르크’(1845), ‘레냐노의 전쟁’(1849) 등은 애국정신을 구가한 작품으로 뛰어나다.
베르디는 이 무렵 ‘나부코’를 작곡하면서 제2의 인생을 출발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게 되는데 후일 인생 후반부의 반려자가 되는 당시 소프라노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를 만나게 된다. 베르디는 나부코의 큰 딸 아비가일 역을 주세피나에게 맡기고자 1842년 12월에 그녀를 만난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주세피나는 1834년 말 19세 때 데뷔 후 스타로 떠오르며 가족 부양을 위해 많은 무대에 오른다. 활동 당시 주세피나는 네 아이의 유부남인 테너가수 나폴레오네 모리아니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1837년부터 내연관계가 이어진다. 1842년 주세피나는 모리아니의 세 번째 아이를 가진 가운데 참담한 실패를 맛보면서 동시에 양육비 문제로 모리아니에게 환멸을 느끼고 헤어지고자 마음을 먹는다. 바로 이 무렵에 베르디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1842년 12월 베르디가 주세피나를 처음 만날 때 주세피나 역시 베르디처럼 삶과 음악 모두 절망적인 시기였다. 베르디는 주세피나가 다시 무대에 오르도록 격려한다. 드디어 1846년 나부코 공연에서 주세피나는 대성공을 거두고 청중으로부터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는다.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게 되고 1848년 동거를 시작하여 1859년 8월 마침내 결혼한다.
이들이 결혼한 후에 사람들은 주세피나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부세토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비난한다. 마을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에 분개한 베르디는 주세피나와 함께 부세토를 떠나 산타 아가타의 농장으로 옮기고 사랑을 가꾸며 55년을 함께 한다. 인간적으로 음악적으로 주세피나는 베르디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 더없이 고마운 반려자가 된다.
‘라 트라비아타’(1853년)는 베르디가 파리에서 주세피나와 함께 본 연극 ‘카멜리아의 여인’에서 감명을 받아 만든 오페라다. 육체는 타락했을지라도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주인공 마그리트 고티에를 보며 주세피나를 떠올렸을 것이다.
26편의 오페라를 남긴 베르디는 이태리 최고 작곡가로서의 명성과 범국가적인 존경을 받는다. 1840-1850년대 이태리 북부는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으며 이 시기에 이태리 여러 극장에서 베르디 오페라가 상연된다. 그의 작품 중 20여 편에 전쟁이 언급되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이 나온다. '나부코'에서 아시리아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들의 합창'을 부르는데 이는 이태리 국민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베르디 작품의 공연이 끝나면 객석에서 "비바 (만세) 베르디!"라는 함성이 터진다. 이 때 외치는 '베르디'는 작곡가 베르디 외에 당시 이태리 유일한 독립 왕국인 사르데냐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동시에 지칭하는 것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Vittorio Emanuele Re D'Italia)에서 앞 글자만 따면 'VERDI'가 된다. 독립을 염원하는 청중은 ‘비바 베르디!’를 외치고, 오스트리아 경찰은 작곡가에 대한 칭송을 제지할 수도 없는 가운데 베르디는 일약 유명해진다.
청중들은 베르디 작품 '조반나 다르코'에서 영국에 맞서는 프랑스 군중, '돈 카를로'에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플랑드르 시민들, '일 트로바토레'에서 아라곤과 싸우는 집시들, '시칠리아섬의 저녁 기도'에서 프랑스에 투쟁하는 시칠리아 백성을 보면서 독립 의지를 불태운다.
그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라로부터 초청을 받고 이태리 오페라 대표 작곡가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베르디의 명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만약 여기에 머물렀다면 오늘날의 베르디는 없을 것이다. 베르디는 1850년대 이후에 더욱 원숙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1850년 37세의 베르디가 40일 동안 작곡한 ‘리골레토’는 이듬해인 1851년 3월 베네치아에서 초연되어 관객들이 엄청난 호응을 보인다. 이를 통해 베르디도 자신감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극중 아리아 ‘여자의 마음’은 초연 전에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무대연습 때에도 가수에게 악보를 주지 않고 초연 전에야 악보를 제공할 정도였다. 이 아리아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그의 명성은 더욱 올라간다.
‘리골레토’ 이후의 베르디는 독특한 아름다운 선율과 극적인 구성력을 최대한으로 구사하여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인간의 다양한 감정 표현과 등장인물의 성격을 정확하게 묘사하여 여러 걸작을 선보인다. ‘일트로바토레’(1853), ‘라 트라비아타’(1853), ‘돈 카를로스’(1867), ‘아이다’(1871), ‘오텔로’(1887), ‘팔스타프’(1893) 등이다.
그는 이 같은 작품에서 애국주의에 머물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의 '인간 그 자체'의 표현에 집중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속성'을 묘사하는 데 있어 모차르트와 비견할 최고의 수준이라 평가받기도 한다.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아이다 모두가 비극이나, 오텔로는 비극의 최고봉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인물의 다양한 속성을 이처럼 훌륭하게 표현하여 오페라로 만든 작곡가는 베르디가 유일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르디의 유일한 희극 팔스타프는 오페라 부파의 특징 구현, 세상물정과 동떨어진 고답적인 웃음을 음악으로 빚어내는 솜씨가 한껏 돋보인다.
러시아가 의뢰한 ‘운명의 힘‘은 중기의 대표작이다. 이집트정부가 의뢰한 ’아이다‘는 종래 작품의 작곡 기법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현실적이고 관능적인 감각에 아름다운 선율, 극적인 표현, 기타 작곡에 필요한 여러 요소가 결합된 수작이다.
그는 오페라 이외의 작품도 작곡하는데 가곡, 현악4중주 마단조 등이며, 최대 걸작은 이태리 애국시인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죽음을 애도하여 쓴 레퀴엠이다.
베르디는 1861년 통일 이태리의 초대 상원의원이 된다. 5년 임기를 끝내고 고향에 돌아와 농장을 경영하면서 '팔스타프'를 작곡하는 등 활동을 계속한다.
베르디는 86세 때 전 재산을 투입하여. 밀라노에 '안식의 집‘을 세운다. 은퇴 후 갈 곳이 없거나 생계가 어려운 음악가들을 위한 곳이다. 그는 "나는 행운으로 명성과 재산을 모았지만, 이를 위해서만 일한 것이 아니다. 예술의 길에서 함께 했던 음악가 중에 빛을 보지 못하고 힘든 노후를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모두 나의 사랑하는 동료다".
안식의 집은 건축가 카밀로 보이토가 설계한 아름답고 붉은 벽돌 건물로서, 당시 획기적인 설계와 최신 시설을 갖춘 양로원이며 이후 이태리 양로원 건축의 모델이 된다. 은퇴한 음악가들은 여기에서 연주하고 레슨도 하며 매일 음악이 그치지 않는다. 영화 ‘콰르텟‘(더스틴 호프만 감독)은 이곳을 모델로 하였다.
베르디는 1901년 1월 27일 밀라노 한 호텔에서 8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전 세계 오페라 역사상 우뚝 선 거장의 죽음을 슬퍼하여 장례식에 20만이 넘는 애도객이 참가한다.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8백 여 명의 합창단원과 오케스트라가 ‘나부코’의 ‘히브리 노예의 합창’을 부르고 밀라노 거리는 검은 상복의 사람들로 물결을 이룬다.
그의 부인 주세피나는 베르디보다 4년 전에 먼저 떠난다. ‘안식의 집’ 예배당 안쪽에 베르디와 주세피나, 첫 부인 마르게리타의 묘가 있다. 당시 일반묘지 외의 장소에 매장하려면 당국의 허가가 필요해 한 달 동안 밀라노 시립묘지에 머물렀다가 이장된다. 베르디는 안식의 집을 스스로 ‘인생 최대의 걸작’이라 불렀고 유지비는 자신의 인세로 충당하라는 유언을 남긴다.